필자가 이용하는 백화점이 보낸 DM (Direct Mail)을 보다가 정말 깜짝 놀랐다. 잘 되어야 대학생이나 이용 할만 한 백팩(이라고 썼으나 결국 책가방) 하나의 가격이 40만 원에 육박하는 것이 아닌가! 얼마 전에는 등골브레이커라는 별명을 얻은 한 국내 기업의 패딩 점퍼가 사람들 입방아에 오른 적도 있었다. 이건 정말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이것이 비단 청소년들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결국 버스나 지하철 안에서도 버스나 지하철과는 어울리지 않는 명품 가방을 든 여성들을 정말 흔하게 볼 수 있고, 결혼 할 때 당연히 명품 시계 하나 쯤은 가져야 하는 줄 아는 친구들도 흔하디 흔하게 볼 수 있지 않은가.
그래서 찾아보았다.
McKinsey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명품 소비액은 글로벌적 경기침체에도 불구하고 2005 년 이후 연 평균 12% 씩 증가하여 2011 년에는 가구소득(Household Income) 당 명품소비액의 비중이 5%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통계청에 따르면 우리나라 2011 년 가구당 월 평균 소득은 약 385만 원이었는데, 이를 통해 연간 소득을 4620만 원으로 가정한다면 우리나라의 가구들은 모두 연간 230만 원 가량을 명품에 소비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다른 나라는 어떨까? 그래서 샤넬 가방에 죽고 못산다는 옆 나라 일본의 경우를 들여다 보았다. 가구당 평균 소득이 약 7670만 원(일본 노동후생성 자료)인 일본은 이 중 약 4% 가량을 명품에 소비한다. 우리보다 약간 더 많은 가구당 연 평균 300만 원 정도를 명품에 소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명품소비 외 금액, 즉 "(가구소득) - (명품구매액)"을 따져보면 우리는 4390만 원, 일본인들은 7370만 원 정도를 남기게 되어 거의 배에 가까운 차이를 보이게 된다. 결국 우리의 명품선호가 소득규모에 비해 그만큼 비정상적으로 크다는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세계 2 위의 명품소비국가이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비정상적인 명품에 대한 선호는 '사회적 신분에 대한 과시욕'으로 설명될 수 있다. 결국 Display Behavior라고 부르는 그것은 모든 인간의 본성이고 명품산업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그와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필자가 우리나라의 여러 훌륭한 점 가운데 가장 우려하는 것이기도 한, "단일민족"이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단일민족이라는 순혈주의의 관점 속에서 우리는 우리와 다른 것에 대한 경계를 무의식 속에 당연한 것으로 체득하였다. 그리고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 안에서도 다른 것, 혹은 다르게 되는 것에 대한 무의식적인 거부반응 역시 학습하였다.
앞서 잠깐 언급하였던 '등골브레이커'를 청소년들은 왜 갖지 못해 안달하는가? 결국 집단과 다른 것에 대한 배척, 혹은 다른 이가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 가까운 심리 때문 아닌가? 빚을 내가면서 (신용카드 할부? 다 '빚'의 듣기 좋은 이름에 불과하다) 왜 '똥' 가방 하나씩을 다 들어야 하는가? 마찬가지로 남들 다 하나씩 있는데 나만 없으면 달라지는 것에 대한 거부감 아닌가? 이렇게 '단일민족'이 아닌 문화권에 비해 우리는 이질(異質)이 되는 것에 대한 거부감과 불안감을 크게 느낀다. 같고 다름의 문제가 우리에게는 맞고 틀림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혹자는 이러한 우리의 성향을 "정답문화", 즉 남들이 행하는 것을 정답으로 믿고 그것만을 추종하는 문화라고 부른다. 결국, "모난 돌이 정을 맞는" 우리나라 문화 안에서는 결국 "좋은게 좋은 것"일 수 밖에 없다.
문제는 "창의"와 "혁신"이라는 것이 그 정의에 따라 결국은 "다름"을 전제로 하는 것이라는 데에 있다.
모두가 오른쪽으로 가고 있을 때 왼쪽으로 갔기 때문에 탄생하는 것이 결국 혁신 아닌가? "정답문화"와는 정면으로 대치되는 것일 수 밖에 없는 것이 바로 혁신인 것이다. "좋은게 좋은 것"이 라는 사고 속에서 혁신은 절대로 탄생할 수 없는 것이다.
지금 필자는 타인의 다름을 용인해야 하네 마네, 사회가 어떻네 하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혁신적이 되려거든 지금 글을 읽고 있는 당신 스스로가 남들과 달라야 한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 TV에서 차기 정부의 국정목표 중 하나가 "창의교육과 창의경제"라는 뉴스가 나오고 있다. 그러나 뒤돌아 보면 1990 년대 말 이후로 "창의"가 강조되지 않았던 적이 있었는가 싶다. 따라서 문제는 사회가 어떠한가와는 관계 없이 개인 스스로가 "창의적이 되려는 의지가 있는가?", 그리고 "그럴 수 있는가?"가 아닐까? 게다가 사람들의 집합인 사회는 언제나, 그리고 어디에서나 중심회귀적, 즉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 사회가 창의적이 될 수 없도록 가로막아서 내가 혁신적이 될 수 없었다고 말하는 것은 이미 그가 '정답문화'와 '그룹사고(Group Thinking)'에 젖어있음의 증거이다. "당신"이 창의적인 사고를 하고 혁신을 만들어내는 것과 사회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물론 장기적으로 보다 큰 자유로움과 다양성을 수용할 수 있는 방향으로 변화하는 것은 사회가 가진 숙제이다)
혁신은 모두가 오른쪽으로 갈 때 왼쪽으로 갔고, 모두가 다리 위에서 머무를 때 그 다리에서 뛰어내렸기 때문에 탄생한다. 물론 다리에서 뛰어내리지 말라는 말을 듣고도 뛰어내린다면 당연히 엄청나게 다치거나 심지어 죽게 될 것이다. (뛰라고 말하는 것이 오히려 잘못된 것 아니겠는가?) 그러나 만약 운 좋게도 다리만 부러지고 살아남았다면 당신은 부러진 다리를 질질 끌고 올라와 다시 뛰어 내릴 것이다. 멀쩡히 뛰어내릴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될 때까지 말이다. 멍청하고 미친 짓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혁신적이 된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당신이 혁신적이지 못한 이유는 다르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름으로 인한 거북함을 기꺼이 감내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스스로가 달라지기를 무릅쓰지 않는 한 당신은, 우리는 결코 혁신적이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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