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갱님, 당황하셨어요?” 보이스 피싱 체험기
2016년 08월 01일

전기통신금융사기, 그러니까 '보이스 피싱'이란 걸 당할 뻔했다. 통장에 든 돈 모두 탈탈 다 털리기 일보 직전까지 갔다. 보안회사에 다니다 보니 이런 쪽 사건 및 사고에 나름 익숙한 편인데, 평소 업무도 "개인정보를 조심하세요!" 떠드는 게 일인데, 내가 어쩌자고 이런 일을 다 당하나, 정말 부끄러워 낯을 못 들 지경이다. 회사에서 당한 일이라 사내에 소문 쫙 퍼져 다들 나만 보면 낄낄거리며 비웃는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 사회에서 보이스 피싱은 하도 흔해 코미디 소재가 된 지도 이미 옛날이다. "고갱님, 당황하셨어요?" 중국조선족 특유의 말투 개그가 떠올라 스스로 막 미웠지만, 내가 받았던 전화는 아주 정확한 서울말이었고 시나리오도 매우 정교했다.

사건의 전모

업무 중 전화가 왔다. 070 어쩌고가 아니라 010 일반 번호였다. 자기는 서울지방검찰청의 김OO 수사관인데, 대포통장 불법개설 사기 범죄에 내가 연루되었기 때문에 수사협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OO씨, 서울시 OO동 OO아파트 사시죠? 주소지 인근 OO공인중개사 사무소(는 실제로 있는 곳이다.) 대표와 그 일당이 박OO씨 명의를 도용해 대포통장을 만들어 4,200만 원의 대출을 받았는데, 박OO씨가 그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해야 합니다." 이런 설정이다. 한심하게도 이때 난 나의 개인정보, 특히 주소까지도 알고 있으니 공공기관 맞겠지 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무서운 건 김OO 수사관이라는 자의 태도. 지금 이 대화가 아주 귀찮다는 듯 건성으로 말하는 무관심한 태도가 대충대충 일하는 무성의한 공무원에 대한 일반적이고 전형적인 선입견에 딱 들어맞아 전혀 의심할 수 없었다. 실제로 검찰청에 가면 이런 사람이 날 이렇게 대하겠지 싶은 심드렁한 태도. 만약 그가 "큰일 났어요!" 라며 아주 열심히 떠들었다면 오히려 의심했겠지? 라고 쓰다 보니 더 부끄럽지만, 아무튼 그땐 그랬다. 그리고 김 수사관은 담당 검사님을 바꿔 주겠다며 자기 역을 마쳤다. 역시 귀찮다는 듯. 나쁜 놈이지만 정말 칭찬하고 싶은 연기력이다.

이번엔 황OO 검사였다. 통화 중에 인터넷 검색해 보니 실제로 서울지방검찰청에 근무하는 검사 이름이었다. 검사 사칭이라, 용감하기도 하지. 황 검사 캐릭터도 시나리오 상 자기 역할에 매우 충실했다. 적당히 젠틀하면서도 은연중 상대를 깔보는 듯한 자연스러운 거만함, 딱 TV 드라마에서 늘 보던 바로 그 검사 캐릭터다. 역시 나쁜 놈이지만 칭찬하고 싶을 정도의 연기력. 황 검사는 검사답게 긴 설명 따위 안 하고 사건보고서를 임시로 웹 서버에 올려 뒀으니 참조하라고 했다. 그 '임시'란 말도 이제 보니 검찰청 사이트 주소가 아닌 숫자로 된 IP 주소를 합리화하려는 수작인 것 같다. 참 잘 짠 시나리오다.

열어 본 사건보고서는 진짜로 진짜 같아 보였다. 검찰청은커녕 동네 파출소에도 가 본 적 없는 나로서는 의심하고 싶어도 의심할 수 없을 정도로 잘 만든, 모름지기 검찰청쯤 되면 딱 이런 문서를 쓸 것만 같은 딱 그런 문서. 입력창에 내 이름과 생년월일을 입력하니 해당 사건개요와 협조수사 시 유의사항 뭐 그런 게 쪼르르 뜬다. 그럴싸하다. 너무나 그럴싸해서 이때 그나마 아주 약간 남아 있던 일말의 의심도 모두 다 봄날 눈 녹듯 사라지고, 완전히 낚였다. 사건개요를 읽어 보니 나는 정말 영문도 모른 채 이 사기꾼들에게 당해 난 본 적도 없는 돈 4,200만원을 고스란히 내가 다 갚아야 할 것 같았다. "이제 전 어쩌죠?" 내 불안을 눈치 챈 황 검사는 본격 작전에 돌입했다.

우선, '유선 상 협조수사 가이드'의 지시사항을 다시 읽어 보라 했다. 지시사항에 따르지 않으면 검찰청에 직접 출두해야 하고 공범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오랜 시간이 소요될 것이며 결정적으로 피해자 입증이 불가능해지니 어쨌든 본인 명의로 되어 있는 통장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것이며 이는 단지 변제뿐 아니라 민형사상 책임까지 포함한다 등등등. 특히 수사과정을 제3자에게 발설하는 즉시 공범이 따로 존재한다고 판단되므로 발설하지 않았음을 증명하기 위해 전화를 끊지 말라고 강조했다. 쓰다 보니 '요즘 누가 이런 뻔한 수법에 당해?' 자괴감이 들지만, 아 그건 우리 황 검사님 목소리를 안 들어 봤기 때문에 쉽게 말하는 한가한 이야기다. 직접 당하면 누구나 속을 만한 디테일이 아주 무시무시하다.

"그럼 이제 전 뭘 해야 하나요?" 황 검사님께서는 피해자 입증을 위해 내 진짜 계좌가 범죄에 사용되는 소위 깡통계좌가 아님을 증명하라신다. 계좌에 든 돈 모두 현금화 하라신다. 아니면 피해자 증명을 할 수 없을뿐더러 통장이 마이너스 통장으로 전환되어 추가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고 하신다. "네!" 이미 완벽한 바보가 된 나는 당장 은행으로 달려가 통장에 든 돈 모두 인출했다.

"돈 다 찾았어요. 이제 어쩌죠?" 황 검사는 내가 무려 검사씩이나 되는 사람인데 이런 사소한 일까지 직접 다 해야 하냐는 듯 귀찮아 하며 "잠깐만요. 제가 가상계좌 하나 만들께요. OO은행 서OO OOO-OOO-OOOOO, 여기로 입금하세요. 정상계좌 확인 후 원위치 하겠습니다. 금융감독원과 합동수사 중이기 때문에 이체 등 과정은 깔끔하게 진행될 거구요."

이때, '입금'이란 단어의 압박감 때문에 순간 퍼뜩 정신을 차렸다. "입금은 왜 해야 하죠? 이런 절차는 검찰 수사 과정에 있어 흔히 일어나는 일인가요?" 황 검사는 당황한 듯했다. 아마도 자기가 연습해 둔 대사는 딱 거기까지였나 보다. 왜 수사에 불응하느냐며 막 화를 내더니 이번엔 금융감독원 직원을 바꿔 주겠단다.

금융감독원 직원이라는 자는 그 조직 내에서 월급 가장 많이 받는 자일 것 같다. 그만큼 말솜씨가 굉장했다. 난해한 전문용어 남발하며 매우 수려하게 말했다. 지난 수사에서의 피해사례와 검찰청과 금융감독원이 어째서 공동으로 가상계좌를 운용하는지 그리고 이에 불응 시 어떤 피해를 입게 되는지 등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했다. 자기 역할 참 잘하긴 했으나 이미 의심을 시작해버린 내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아, 전화기 배터리가 다 됐거든요. (실제로 1시간 30분 동안 통화했다.) 일단 충전하고 다시 켤께요." 전화를 끊었다.

넋을 잃고 멍한 채 손에 돈봉투 덜렁 들고 회사로 돌아오는 길에 직장 동료들을 만났다. "O과장님! 검찰청에서 수사한다고 막 가상계좌 쓰고 그래요?" 그들은 내가 말 마치기도 전에 푸하하하 웃었다. "전화기 줘 봐요. 내가 받으께!" 놀랍게도 전화기를 켜자마자 바로 전화가 왔다. 끄고 있는 동안 계속 걸었나 보다. 전화를 받은 O과장이 "내가 친오빤데, 무슨 일이죠?" 말하자마자 눈치 빠르신 우리 황 검사님은 그 짧은 시간에 자기가 아는 세상의 모든 욕이란 욕은 다 내뱉더니 전화를 탁 끊었다.

쓰고 보니 정말정말 한심하다 싶지만 그럼에도, 참 잘 쓴 시나리오를 제대로 잘 연출한 연극 한 편 본 것 같았다. 꾼들은 능수능란했고 솜씨는 변화무쌍 현란했다. 나 아니라 그 누구라도 그 순간 당황했으리라, 애써 스스로를 위로 했다.

개인정보라는 미끼

요즘 보이스 피싱 범죄의 먹잇감 연령대는 기존 60~70대에서 20~30대로 낮아졌다고 한다. 특히 결혼비용등 목돈 마련 위해 고액의 적금통장을 만든 미혼 여성을 주로 노린다고 한다. 상대적으로 금융 그리고 법 관련 지식이 부족하고 아직 사회 초년병 신세라 권위에 쉽게 순응해버려 높으신 분이 하라고 하면 토 달지 않고 잔말 없이 재깍재깍 하는 게 버릇이라 일단 낚시를 물기만 하면 노인들보다도 더 말을 잘 듣기 때문이라고 한다. 매우 불쾌하지만! 그 수법에 당했던 입장이라 뭐라 할 말이 없네, 그저 부끄럽다. 하지만 사람 심리를 교란하는 수법을 최대로 끌어올리는 교묘한 역할 분담과 말솜씨의 공포는 정말이지, 아 진짜로 당해 봐야 알 수 있다. 낚시를 물고 거의 물가까지 끌려갔다 겨우 탈출한 그 기분은.

보이스 피싱 낚시꾼들이 쓰는 미끼는, 개인정보다. 나도 그들이 내 개인정보를 줄줄줄 읊을 때 그만 정신줄을 놓았으니. 지금 생각해 보면 특히 주소 말할 때 불안감이 최고조에 이르렀던 것 같다. 그러니 너무나 자주 떠서 익숙해져버려 이젠 뭐 그런가 보다 화도 안 나는 "개인정보 OOOO건 유출!" 사건 기사를 예사로 여기면 안 되는 것이다. 그렇게 유출된 개인정보는 범죄자들이 데이터를 유출당한 회사를 협박해 몸값을 요구하는 인질로만 쓰이는 게 아니라 이렇듯 블랙마켓에서 거래된 뒤 2차 그리고 3차 피해로 이어진다. 이토록 무서운 사건을 왜 그리 가볍게 다루는지 정말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최근 일어난 사고만 보더라도 A 항공사에서 유출된 개인정보에는 주민등록증, 가족관계증명서, 여권, 전자항공권 사본까지 포함되어 있다. 곧이어 발생한 전자상거래 I 사 사건에서는 무려 1천만 명의 개인정보가 유출되었다. 낚시꾼들은 그렇게 탈취한 개인정보를 미끼 삼아 낚시질을 할 것이고 나 같은 자들이 또 낚일 것이다. 아니 그럼 이렇게나 위험한 개인정보 유출 사건을 왜들 그리 가볍게 다루는 걸까? '개인정보' 그리고 '벌금' 키워드로 검색해 보자. 비슷한 제목의 기사가 몇 페이지 쪼르르 뜬다.

"개인정보 유출, 벌금 1천만원으로 끝. 솜방망이 처벌로 흐지부지"

기업이 사용자 개인정보를 소홀히 여기는 까닭은 이렇듯 뻔하다. 이래서야, 정말이지 불안해서 못 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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