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 관람가 20. <족구왕> 스타트업이 꿀잼이라 다행이야
7월 8,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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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가장 좋았던 영화가 뭐예요?”

이런 질문을 종종 받습니다. 그럼 전 그 상태로 굳습니다. 두뇌를 풀가동 하기 위한 한시적인 육체 쪽의 전력차단입니다. 머릿속에선 황급히 영화 DB를 검색합니다. 질문과 대답 사이 정적과, 대답을 예상하는 질문자의 눈빛이 빨리 좀 서두르라고 다그칩니다. 그 압박은 마치 “엄마한테 세뱃돈 맡겨놓을 거지?” 라는 질문을 들은 초딩의 설날 오후처럼 다급합니다. 그러나 답은 나와주지 않습니다. 늘 그렇듯이.

아 정말 야속할 정도로 인정사정 없는 질문입니다. 영화를 무척 좋아해서 틈만 나면 영화를 보는 사람에게는 아찔하게 잔인한 질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많은 좋은 영화들 중에 오직 한 편만을 꼽아야 한다니, 그런 일은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질문을 들으면 그냥 그때그때 최근에 가장 재밌게 본 영화를 말하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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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구왕>을 그래서, 약 1년간 많은 사람들에게 추천해주었습니다. 이 영화가 개봉하던 해에 가장 좋았던 두 편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과 <족구왕>이었거든요. 사실 이 영화를 보러 간 것은 순전히 호기심 때문이었습니다. 복학생이 족구하는 영화라니요. ‘아니 대체 누가 21세기에 이런 더러운(?) 소재로 영화를 만들 만큼 대담한 자인가’하는 마음이었습니다. 당연히 기대는 별로 안했고 그저 가벼운 마음으로 봤습니다.

그런데 이게 뭔가요. <족구왕>은 정말 자지러지게 웃겼습니다. 친구와 저와 작은 극장의 관객 모두가 거의 뽕맞은 사람들처럼 웃었습니다. 저는 콜라도 몇 번 뿜을 뻔 했습니다. 여태껏 본 한국 코미디 영화를 통틀어서 단연 최고로 웃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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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구왕이요. 진짜 엄청 웃겨요.”

좋은 영화를 묻는 질문에 약 1년간 이렇게 답했습니다. 그런데 대답을 들은 질문자들의 반응이 이상했습니다. 반응은 대부분 한결같았습니다. 영화를 안 본 사람들은 "뭐야… 영화 좋아한다더니 웬 족구왕이냐"였고, 영화를 본 사람들은 웃겼다는 것 말고 다른 것으로부터 의미를 찾으려 했습니다. “아… 족구왕이요. 아… 맞아요 시도가 신선했죠. 웃기기도 했지만 역시 해학으로 풀어낸 청춘의 아픔이…”

그때마다 아니라고 해명하고 싶었습니다.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아닙니다. 전 그냥 웃겨서 좋았습니다. 그냥 너무너무 웃겼고, 단지 그뿐입니다. 홍시맛이 나서 홍시맛이 난다고 하였는데 어찌 홍시맛이냐고 물으시는 것입니까. 코미디영화가 웃겼으면 된 거 아닌가요? 안 되겠다, 다시 얘기해야지.

“아뇨, 전 그냥 웃겨서 좋았어요. 배트맨 영어연극 장면에선 콜라도 뿜을 뻔했다니까요.”

질문자는 당황합니다. 뭔가 이해가 안된 듯한 눈초리를 보입니다. 그러나 곧 하던 말을 이어갑니다. “그렇죠, 코미디의 외피를 쓰고 있지만 그 안에 녹아있는 비판적 메시지가… 부산국제영화제의 심사위원 반응이… 헬조선에 사는 루저에 대한 연민이…” 아닙니다. 아니라고요. 난 그냥 웃겨서 좋았다고. 겁나게 웃겼다고요 이 호박고구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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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에는 쓸데없는 엄숙주의가 있는 것 같습니다. 왜 우린 모든 것에서 정형화된 메시지 혹은 틀에 맞는 정답을 찾으려 하는 걸까요. 코미디 영화를 보면서도 감동이나 계몽의 메시지를 찾으려 합니다. 게임을 할 때조차 괜히 죄책감을 느낍니다. 게임은 재밌자고 하는 건데요. 심지어 힙합을 들으면서도 힙합에 사회가 요구하는 바른생활의 가치를 적용합니다. 원래 삐딱한 게 재미인 장르인데 말이죠. 대중뮤지션들 중에 힙합씬이 학벌이 제일 좋고, 심지어 기부천사들인 나라는 우리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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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이즈게임 TIG카툰 ‘호드 50’편 By 원사운드

아쉽습니다. ‘재미’라는 가치에 대한 사회의 평가가 너무 박한 것 같아요. 애써 재미를 부인하고 뭔가 더 고오급스러운 가치를 전면에 내세우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경향은 스타트업 업계에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창조적 혁신’이나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변화시키고 싶다’는 말들 이전에, 스타트업 문화의 기저에는 그보다 ‘재미’라는 가치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정말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다는 마음으로 스타트업을 시작하는 걸까요? 그보다 그냥 내가 재밌는 일을, 재밌는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직장을 찾다보니 스타트업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최근 삼성이 ‘스타트업 삼성’을 선언한 기사를 봤습니다. 그러나 어색한 단어조합을 걸고 선포식을 했다고 삼성이 스타트업 문화를 갖게 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다른 이유보다도 일단 삼성은 재밌는 기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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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쿱미디어의 ‘스타트업 불효자식’ 티셔츠

스타트업이 놀라운 결과들을 만들어낼 수 있는 이유는 결국 재미 때문일 수 있습니다. ‘재미’라는 가치에는 사실 아찔하게 무서운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재밌는 아이템이 떠올라서 자다가 말고 벌떡 일어나고, 그저 개발이 재밌어서 시키는 사람이 없어도 밤을 새우고, 딱딱한 상하관계는 재미없으니까 유연한 분위기를 만드는 곳이 바로 스타트업 아닌가요.

<족구왕>에서 사람들은 족구를 열심히 하는 만섭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족구를 대체 왜 하냐”는 질문에 만섭은 이렇게 답합니다.

“너한테는 족구가 뭐냐?” (공시생 선배)

“…재밌잖아요.” (만섭)

이 대사가 좋았습니다. 재밌으면 된 거 아닌가요? 재밌다는 열심히 지속할 수 있다는 것이고, 그러면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며, 지속적으로 발전하면 뭔가 반드시 이뤄낼 수 있습니다. 재미가 이렇게 무섭습니다 여러분. 재미는 무시할만한 가치가 아닙니다.

기성 직장에 비하면 스타트업은 그야말로 ‘꿀잼’입니다. 그게 참 다행입니다.

이미지 출처: KT&G 상상마당

slogup
김상천 coo@slogup.com 슬로그업의 영화 좋아하는 마케터. 창업분야 베스트셀러 '스타트업하고 앉아있네'의 저자입니다. 홈·오피스 설치/관리 플랫폼 '쓱싹'을 운영하고 앉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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