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 관람가 38. 비긴 어게인 – 이 소음까지 다 음악이 될 거야
11월 25,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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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한 스타 프로듀서, 배신당한 뮤지션. 망가진 그들이 음악을 통해 다시 일어선다.'

아니 이 뻔한 영화를 이렇게 상쾌하게 찍을 수 있나요? 《비긴 어게인》은 그야말로 사랑스러운 영화입니다. 싱그럽습니다. 처음 보았을 때는 '그래도 《원스》가 더 낫네'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존 카니 감독의 음악 영화 3부작 중 이 영화가 제일 좋습니다. 왜 볼 때마다 점점 더 좋아지는 걸까요.

귀가 호강한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겠죠. 이제는 〈로스트 스타〉(Lost Stars)를 따라부른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많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귀뿐만 아니라 눈의 축제이기도 했던 것 같네요. 영화를 다시 보면서 느꼈는데, 관객을 두근거리게 하는 멋진 장면이 정말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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댄(마크 러팔로 분)은 골목에서 노는 꼬마애들을 꼬셔서 코러스로 세웁니다. "조용히 좀 하고 나를 잠깐 도와주면 1달러씩 줄게"라고 말합니다. '초딩'들은 채팅창에 '휴먼급식체'로 "ㄲㅈ"라고 적을듯한 표정으로 "아저씨, 5달러씩은 줘야죠"라고 말합니다. 댄이 그러겠다고 하자 이번엔 '딜'을 합니다. "5달러에 막대사탕 한 개씩, 그리고 담배 한 갑이랑 라이터"를 요구하네요. 댄의 반응이 더 재밌습니다. "담배 한 개비 줄 테니까 나눠 피우고, 성냥 한 통 준다"며 '딜'을 마무리합니다. 댄과 그레타(키이라 나이틀리 분)는 그렇게 뉴욕의 허름한 골목길에서 동네 꼬마들을 세워놓고 스타킹을 씌운 마이크로 곡을 녹음합니다.

어디 한 장면 뿐이겠어요. 옥상에서 녹음할 때 건너편 빌딩에서 누가 창문을 열고 "제발 그만 좀 해 이놈들아!"라고 소리치는 장면, 그레타가 댄과 이어폰을 나눠 끼고 들썩이며 거니는 장면, 키스할 거라는 관객의 예상을 깨고 따뜻한 포옹을 나누고 헤어지는 장면. 좋은 장면이 너무나 많습니다. 흐흐 이쯤 되면 슬슬 다시 보고 싶어지지 않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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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 중에서 댄과 그레타는 이런 얘기를 나눕니다.

(댄) 생각해봤는데, 왜 꼭 우리가 스튜디오를 빌려야 하지?

(그레타) 데스크, 녹음실, 방음 같은 게 필요해서요.

노트북과 마이크만 있으면 돼. 도시 전체가 라이브룸이야.

거리에서 녹음하자고요? 어디서요?

어디서나. 곡마다 장소를 바꾸는 거야. 여름 동안 뉴욕 곳곳에서 녹음해 미친 듯이 아름다우면서도 엉망진창인 이 도시에 헌정하는 거야.

좋아요. 갑자기 비가 오면요?

무슨 일이 있어도 하는 거야. 경찰이 체포해도 계속 부르는 거야, 이게 멋진 거야.

허름한 골목을 누비며 노래하는 댄과 그레타는 생명력으로 가득 차서 싱그럽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는 낙오자의 모습이겠지만 가까이서 보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들이 자신의 가치를 믿는다는 걸, 그러면 세상의 기준 같은 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걸 관객들은 느낄 수 있습니다. 댄과 그레타가 쫓는 가치는 진정성 있는 음악입니다. 그 소중한 열정을 진지하게 대합니다. 댄은 이렇게도 말합니다.

이래서 음악이 좋아. 지극히 따분한 일상의 순간까지도 의미를 갖게 만들잖아. 이런 평범함도 문득 진주처럼 아름답게 빛나거든

이 소음까지 다 음악이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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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이 헝그리하게 음반을 만드는 모습은 스타트업이 첫 제품을 출시하는 과정과도 닮아있습니다. 그 싱그러움까지도요. 스타트업을 하면서 가장 두근거리던 때는 첫 제품을 출시하기 직전이었습니다. 묘한 느낌이었죠. 마치 처음 수영장에 엄지발가락을 집어넣을 때처럼 조금은 두렵고 등골이 서늘해지는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첫 제품을 출시할 때 우리의 BGM은 이적의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이었습니다. 그때 블로그에 적어둔 소회는 이랬습니다.

...

난 몸의 예고에 둔감해서 항상 뒤늦게 눈치채곤 한다. 아파야 아픈 줄 안다. 그냥 담담한 줄 알았는데 그래도 출시한다고 꽤 신경을 쓰고 있나보다. 아침에 보도자료 돌려야 해서 일찍 누웠는데 도대체 잠이 오질 않았다. 멀뚱멀뚱 눈앞의 어둠을 올려다보다가, 두 시간 후에도 분명히 이대로 누워있을 것 같은 또렷한 각성상태임을 깨닫고 잠들기를 그만뒀다. 컴퓨터를 켜고 앉았다. 밤새워 일했다.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지난 시간 동안 누적된 정서의 발현일 것이다. 스타트업에서 일하는 사람의, 작은 승리들과 작은 실패들로 이뤄진 징검다리를 건너는 자의 희망, 걱정, 승리감, 좌절, 불안감, 조바심, 용기, 고립감, 그리고 그래도 끝까지 하면 할 수 있다는 다짐들이 녹은 시간이었다. 순도 높은 시간이었다.

미친 ... 새벽 감성은 역시 위험하다. 더 쓰면 손발이 다 오그라들어서 물고기가 될 것이다. 그렇다고 이대로 글을 끝낼 순 없으니까 노래나 하나 듣자. 이적의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스타트업이 들어야 할 음악이다.

잠깐이면 될 거라고 했잖아. 여기, 서 있으라 말했었잖아.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물끄러미 선 채 해가 저물고
웅크리고 앉아 밤이 깊어도
결국 너는 나타나지 않잖아
거짓말 음 거짓말

우우 그대만을
하염없이 기다렸는데
우우 그대 말을
철석같이 믿었었는데
우우우우우
찬 바람에 길은 얼어붙고
우우우우우
나도 새하얗게 얼어버렸네

...

아 이제 진짜 시작이다. 재밌을 것 같다. 우린 아직 갈 길이 멀다. 다행이다.

아니 이 가사는 대체 뭡니까. 이적도 스타트업을 해본 걸까요? 이건 첫 제품을 출시하는 스타트업들의 BGM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잠깐이면 될 거라고 했잖아.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저 때는 두세 달이면 뚝딱 만들어서 금방 떼돈 벌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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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많은 스타트업들이 자신의 가치를 쫓고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 싱그러움을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그들을 응원하는 의미에서 댄의 대사를 조금 바꿔서 말해보면 어떨까 합니다. 댄의 목소리 음성지원, 혹은 하하 목소리 음성지원 버전으로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난 이래서 스타트업이 좋아. 지극히 따분한 일상의 순간까지도 의미를 갖게 만들잖아. 이런 평범함도 문득 진주처럼 아름답게 빛나거든.

이 소음까지 다 빛나는 추억이 될 거야.

영화 이미지 출처: The Weinstein Compa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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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천 coo@slogup.com 슬로그업의 영화 좋아하는 마케터. 창업분야 베스트셀러 '스타트업하고 앉아있네'의 저자입니다. 홈·오피스 설치/관리 플랫폼 '쓱싹'을 운영하고 앉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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