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 생태계 파괴 주범 ‘기본탑재 앱’, 국민내비 ‘김기사’도 울렸다
2014년 09월 30일

결혼식을 위해 부푼 마음을 품고 몇 달 동안 땀 흘리며 다이어트를 하고, 혼수를 장만하기 위해 발품을 팔았다. 드디어 고대하던 결혼식 당일, 곱게 웨딩드레스를 입고 식장에 들어서는 순간 예비 남편 옆에 서 있는 다른 여자를 발견했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이 드라마의 한 장면 같은 사건이 실제로 벌어졌다. 그것도 대한민국 브랜드를 책임지고 있는 국가 대표 대기업인 '삼성'과 ‘SK 텔레콤’, 그리고 김기사 내비게이션을 개발하고 있는 스타트업 '록앤올(LOC&ALL)' 사이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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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환 록앤올 대표

5개월간 만든 앱, 대기업 이해관계 속 하루아침에 폐기처리

정황은 이렇다. 삼성은 자사의 스마트워치 ‘기어S’에 탑재하기 위한 ‘타이젠용 김기사’를 개발해달라고 지난 5월 록앤올 측에 요청했다. 록앤올의 박종환 대표는 삼성과 좋은 관계를 맺어나갈 기회라고 여겨 이 제안을 수락했고, 그때부터 5명의 직원이 팀을 꾸려 오로지 ‘타이젠용 김기사’를 개발하기 위한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투입된 시간만 5개월. 많은 지원금을 받지는 못했지만, 록앤올에게 있어서 국내 최대 대기업인 삼성과 함께 일한다는 것은 돈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박종환 대표가 바라본 것은 김기사 내비게이션이 세계 최초 웨어러블 디바이스에 GPS가 탑재되는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비전과 희망이었다.

중간에도 몇 번이나 일이 틀어질 만한 위기가 있었지만, 여차여차 완성된 ‘타이젠용 김기사’ 앱은 스마트워치 위에 얹혀 세상에 공개될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24일, 박종환 대표는 삼성전자가 스마트워치 ‘기어S’를 최초로 공개한 바로 그 행사장에서 ‘기본앱 탑재 취소’라는 통보를 듣게 된다. 사전에 그 어떤 언질도, 논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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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4일 발표 행사 현장에서는 김기사 앱이 기어S에 기본탑재되어 있었으나, 최종적으로는 무산됐다.

상황보다 더 황당한 것은 삼성과 SK텔레콤이라는 두 대기업 간의 책임 떠넘기기 식 태도였다. 박종환 대표가 사정을 묻자, 삼성은 그제야 “이동통신사 측에서 너무 강하게 반대해서 탑재가 어렵게 됐다”는 답을 들려줬다. 이동통신사에서 도와주지 않으면 판매 자체가 성사되지 않는 통신형 기기이기 때문에 그쪽의 사정을 들어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반면 이동통신사 측에서는 “무슨 소리냐, 오히려 삼성 측에서 김기사 앱의 품질이 좋지 않아, 우리에게 재개발을 요청해왔다”는 입장이다.

박종환 대표는 “김기사는 800만 명의 사용자가 안정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문제 없는 소프트웨어다. 이런 상황이 벌어졌으면 미안하다고 하지는 못할 망정 품질에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서로 책임을 떠넘기고 있으니 상당히 안타깝다”는 생각을 밝혔다.

대기업과 스타트업 간 이러한 사건이 벌어질 경우, 스타트업은 비단 금전적 부분 뿐 아니라 팀워크, 기회 비용 측면에서도 큰 타격을 입는다.

록앤올의 경우에도 인건비는 물론, 5명의 팀원이 5개월 간 여름 휴가도 가지 못하고 쏟아부은 노력이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박종환 대표 입장에서 직원들의 실망감과 사기 저하를 감당하는 것도 만만치 않은 부담이다. 또한 현재 김기사 앱의 일본 시장 진출을 진행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번 프로젝트에 착수하느라 잃은 기회 비용을 따지자면 손해는 이루말할 수 없다. 이번 사건 소식을 들은 중소기업, 스타트업 대표들의 연락도 끊이지 않았다. 자신들도 같은 일을 당했다며 박대표에게 연락해온 것이다.

박종환 대표는 “이전에도 대기업과 일했을 때, 3개월 간 개발했던 프로젝트가 하루 아침에 취소된 적이 있다”면서, “록앤올 같은 경우에는 어느 정도 인지도가 있는 회사여서 단순한 갑을 관계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을 겪었는데, 1년도 안된 초기 스타트업의 경우 문제는 더 심각할 것”이라고 말했다.

문제의 핵심은 스타트업의 기회 자체를 가로막는 ‘기본탑재 앱’

고질적인 대기업과 스타트업 간의 불합리한 갑을관계 이외에 또 하나의 핵심적인 문제를 이번 사건을 통해 짚어볼 수 있다. 바로 혁신적인 스타트업이 나올 수 있는 기회 자체를 막아버리는 이동통신사와 제조사의 ‘앱 기본탑재’ 실태다. 기본앱은 제조사와 이통 3사 간의 협의를 거쳐 결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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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1월 기준 각 제조사 스마트폰 기본탑재 앱 개수 현황

 작년 11월 경실련 소비자정의센터에서는 각 제조사 스마트폰의 기본탑재 앱 개수를 조사하여 발표했다. 경실련은 당시 “기본탑재 앱은 소비자의 선택권 침해는 물론 경쟁사업자 배제, 부당한 거래 유인 등 심각한 부작용을 유발한다”면서, “SKT와 KT, LGU+ 등 통신 3사를 대상으로 소비자의 이익을 침해하는 기본탑재 앱 설치의 자진시정을 요구한다”는 의견을 밝혔다.

이후 한 차례 언론의 비난을 맞은 뒤, 지난 1월 미래창조과학부는 ‘스마트폰 앱 선탑제에 관한 가이드라인’을 발표하며 필수앱과 선택앱을 구분, 선택앱은 사용자가 직접 삭제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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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한 정부 차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번과 같은 사건이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박종환 대표는 “이통사 입장에서는 가입자 유치를 위해 부가적으로 앱 개발을 하지만, 스타트업 입장에서는 목숨을 건 사안이기 때문에 출발점부터가 다르다”면서, “앱 기본탑재는 생태계 내에서 공정한 경쟁을 할 수 있는 기회조차도 잘라버리는 행태”라고 비판했다.

한편 기본탑재 앱을 걷어내면, 생태계도 건강해질 뿐 아니라 일반 사용자의 통신 비용도 절감될 것이라고 박대표는 덧붙였다. 최근 높은 통신비에 대한 비난이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탑재된 앱의 컨텐츠 수급 비용이 고스란히 사용자의 단말기와 통신 요금으로 전가된다는 것이다.

박대표는 앞으로 이와같은 피해를 겪는 스타트업의 수가 줄어들 수 있도록, 앱 생태계 정화에 힘써나갈 것이라는 계획을 밝혔다.

정부 차원에서의 보다 더 적극적인 ‘기본탑재 앱’ 철폐 노력 필요

어떤 프로젝트든 과정 상의 문제로 중단될 수는 있다. 그러나 이번 건과 같이 자금, 인력적인 모든 부분이 열세한 스타트업 입장에서는 최소한의 보호 장치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심각한 타격을 입어 기업 존폐 위기에 처하는 일도 드문 것이 아니다.

계약서도 제대로 작성하지 않은 채, ‘말 어음’으로 시작되는 상하 관계 속에서 대기업은 일이 어그러질 경우 책임 전가에 급급한 채 나 몰라라 하는 태도를 보인다.

이웃 나라 일본의 경우 협업 시 기업 간 작은 샘플 데이터를 뽑아주는 것에 대해서도 일일이 비용을 청구한다. 작은 일조차도 비용을 지급하는 관행이 잘 정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부터 우리 정부에서도 정부 프로젝트가 무산되었을 시 일부 제안 비용을 보상해주는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아직 국내 대기업에게서 그런 여유와 합리성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장난감만 사주면 그만인가요, 예쁜 옷만 입혀주면 그만인가요. 어른들은 몰라요’하는 노랫말의 동요가 있다. 창조 경제의 핵심인 스타트업을 육성하기 위해 자금줄만 풀면 그만이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공정한 경쟁에 뛰어들 수 있는 생태계를 조성하고, 일이 어그러졌을 때 붙잡을 수 있는 구명정을 마련해주는 일이다. 그 첫 단추가 ‘기본탑재 앱’을 철폐하는 일이 될 수 있다.

어쨌건 이익집단인 대기업에게서 자체적인 정화와 혁신을 기대하기란 어렵다. 좋은 양육이란 눈높이를 맞춰 아이의 필요를 헤아리고, 성장을 이끌어내기 위해 적절한 조처를 해주는 것이다. 아직은 무르익지 않은 국내 스타트업 생태계 성장을 위한, 정부의 규제 마련이 촉구되는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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