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리바바 완전 해부 1편] 떡잎부터 다른 IT 철학가 마윈
2012년 11월 05일

2000년 100인의 미래 지도자 선정, 2008년 세계 30대 리더 선정, 2009년 전세계 영향력 있는 100인 선정, 2012년 중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리더 중 8위…등 다 나열하기 힘들 정도로 화려한 이력을 가진 그. 그룹의 대표이자, CEO, 그리고 학교 원장까지 다양한 직책만큼 주체할 수 없는 열정을 가진 그는 알리바바 그룹의 창업자이자 현 알리바바 그룹의 CEO인 마윈(马云)이다.

알리바바를 세계 최고 전자상거래 반열에 올려놓기까지 수많은 어려움과 난관을 이겨 냈던 마윈은 가슴 한편에 ‘절대 포기하지 말자.’를 외치며 지금까지 회사를 발전시켜왔다. 그리고 마윈은 지금의 알리바바가 있기까지 난관을 이겨낼 수 있었던 비결은 어린시절에 있다고 말한다. 남들과는 다른 그의 어린시절, 그곳에서 마윈철학이 발전했다.

 

1. 골목대장 마윈, 영어천재 마윈

1964년 9월, 마윈은 ‘하늘에는 천국이 있다면, 땅에는 쑤저우(苏州)와 항저우(杭州)가 있다(天上天堂,地下苏杭)’라 불리는 중국 호반의 도시 항저우에서 태어났다. 마윈의 아버지는 항저우 경극 협회의 책임자였다. 그래서 마윈은 어린시절부터 한 손에는 해바라기씨와 떡 한 조각을 가지고 경극을 접하기 시작했다. 훗날 마윈은 자신의 상상력에 날개를 달아준 것은 어린시절 듣던 경극의 영향이 크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경극 속에 울려퍼지는 부드러운 비파 소리도 그의 개구장이 성격을 바꾸어 놓지는 못했다.

마윈의 부모는 그가 조용하면서도 예술적인 감각이 있는 아이로 성장하길 기대 했지만 그와 정반대로 고집이 쌔고, 억지 부리고, 장난도 심하고, 타일러도 듣지 않는 개구장이로 성장했다. 마윈이 10살이 되던 그해 항저우에 축제가 열렸는데 마윈은 친구들과 합심하여 수업을 빠지고 축제에 가기로 의견을 모았다. 하지만 이 사실을 선생님에게 들키게 되었고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갈 그때, 마윈이 가면을 쓰고 일어나 군인 연기를 하며 선생님에게 보내줄 것을 권고했다. 어찌보면 참으로 맹랑하지만 마윈의 당당함과 어린 나이지만 내면에서 풍겨지는 기개에 선생님도 넋을 잃고 봤다고 한다.

그리고 마윈 특유의 공동체적 철학은 마윈의 유년시절 형성되기 시작했다. 의협심이 강했던 마윈은 친구들의 문제 해결을 위해 두 팔 걷어 붙이고 나서는 해결사였다. 특히 마윈은 친구가 폭력을 당하는 모습을 보면 참지 못했고, 평소에 잘 모르는 친구더라도 형들에게 구타당하고 있는 현장을 목격하면 득달같이 달려가 형들을 물리치곤 했다. 그 과정속에서 자신은 13바늘을 뀌매야하는 부상 당하고 뼈가 다 들어나 보일 정도로 심한 부상입었지만 마윈은 “사나이는 쉽게 눈물을 보여서는 안된다.”라고 말하며 의연하게 대처했다.

<유년 시절 마윈>

마윈의 이러한 의협심과 따뜻한 마음은 학우들에게도 전달되어 학교 대표를 뽑는 자리에 후보로 거론되었다. 하지만 성적이 안좋았던 마윈은 후보자격을 박탈당했는데, 한 학우가 “나는 마윈을 원한다.”라고 말하며 마윈의 후보자격 회복시켜달라 요구했고, 나머지 학우들의 도움으로 마윈은 초등학교 대표가 될 수 있었다.

마윈은 중학교 진학서해도 기개와 당당함은 여전했지만 성적은 여전히 바닥이었다. 그런 마윈에게 영어에 흥미를 가져다준 인물이 있는데 바로 중학교 때 영어 선생님이었다. 마윈은 새로 부임한 영어선생님을 몰래 짝사랑하게 됐고, 선생님의 마음에 들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영어 공부에 매진했다.

마윈은 중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Crazy English의 창시자 리양(李阳)이 외쳤던 ‘두려움을 떨쳐버려라’라는 말을 가슴에 품고 항저우에서 외국인 관광객이 가장 많은 곳인 서호(西湖)를 매일 출퇴근 하듯이 다니며 만나는 외국인마다 말을 건냈다. 이후에는 서호 가이드 아르바이트를 하며 외국인들에게 거부감 없이 다가갔다.

마윈은 가이드 아르바이트를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해 사용하지 않고 많은 외국인들에게 항저우의 아름다운 풍경 소개하고 중국의 이미지 향상을 위해 부단한 노력을 했다. 어느 한 호주 부부는 마윈의 적극적인 면과 친절함에 감동해 마윈을 호주로 초대했지만 당시 마윈의 상황이 여의치 않아 가지 못하고 팬팔로 계속 연락했었다. 이러한 노력 끝에 마윈은 항저우에서 손에 꼽히는 영어 실력자가 되었다.

<마윈 “영원히 포기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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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가까스로 넘은 대학 문턱

어 실력만큼은 항저우에서 최고로 꼽혔지만 그외 성적은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특히 수학 점수는 찍어도 마윈의 점수보다 많이 나올 만큼 형편 없었다. 고등학교 입학할 때도 마윈은 가고 싶은 고등학교가 있었지만 수학 때문에 포기해야 했었다 하지만 마윈의 당당함은 여전히 살아있어 18살이 되던 해에 성적은 터무니 없었지만 자신감을 가지고 베이징대학(北京大学)에 원서를 접수했다. 하지만 결과는 수학 점수 1점을 맞으며 희망도 가질 틈도 없이 베이징대학에 떨어졌다.

자신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은 마윈, 자신이 공부에는 재능이 없다 여기고 서후에 있는 호텔에 찾아가 입사시험에 응시했다. 당시 마윈은 사촌동생과 같이 호텔에 입사시험을 봤지만 마르고 서비스에 부적합한 얼굴이라는 이유로 사촌동생은 붙고 마윈은 떨어졌다.  결국 마윈은 외모가 필요하지 않는 잡지사에 취직했고 고단한 인생 속에 하루하루 살아가며 희망도 꿈도 없이 시간을 흘려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마윈은 항저우 기차역에서 루야오(路遥) 의 소설 ‘인생’을 읽게 된다. ‘인생’의 주인공이 이상과 현실에서 겪어야 했던 스토리와 “시련을 겪지 않고, 무지개를 보려 하는가”와 같은 글귀가 마윈의 마음 저 깊은 곳에서 혁명을 일으켰고, 마윈은 인생의 깨달음 얻어 다시 한번 대입과 싸우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그해 마윈은 다시 한번 대입에 도전했지만 결과는 수학점수 19점. 하지만 마윈은 좌절하지 않고 계속해서 대입을 준비했다. 마윈은 집안 사정으로 낮에는 직장, 밤에는 야간학교에 다녔고, 일요일에는 남들보다 먼저 일어나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열정을 보였다. 칼을 갈고 덤벼든 3번째 도전, 하지만 또다시 수학 시험을 79점 맞았고 80점이 커트라인이던 당시 입학이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됐다. 하지만 마윈은 포기하지 않고 항저우에 있는 사범대에 원서를 접수했고, 초조하게 기다리던 그때 항저우사범대의 입시지원자 수가 계획했던 인원수 보다 적어 지원자 모두 합격처리되 마윈은 3번의 도전 끝에 대학 문을 밟을 수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대학에 입학한 마윈은 영문학과에 진학해 물 만난 고기처럼 숨겨저 있던 재능을 펼치며 다양한 활동을 하게 된다. 학업은 물론이고 각종 동아리에도 참여하며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했고 서호 인연으로 계속 연락하고 지내던 호주 부부의 초청으로 호주를 방문했으며, 호주 부부의 원조로 풍요로운 대학생활을 즐기게 된다.또한 어렸을 때부터 갖고 있던 그의 의협심과 용기는 대학시절에도 여전히 발휘되 항저우사범대 학생회의 주석으로 당선되었다. 마윈의 소문은 항저우사범대 뿐만 아니라 항저우에 있는 대학에 까지 미치게 될 정도로 유명했었다.

그리고 마윈은 대학 기간동안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든든한 지원군이자 동반자이자 반려자인 장잉(张瑛)을 만나게 된다. 대학교 1학년 만나게된 마윈과 장잉은 서로 지지하고 격려하며 발전해왔고 결혼에 골인하게 되었다. 마윈은 알리바바가 지금 위치에 있을 수 있는 것에 대해 장잉의 역할이 크다고 밝힌 적이 있다.

 

3. 마윈의 첫 창업 ‘번역사무소’

1988년 우수한 성적으로 항저우사범대를 졸업한 마윈, 사회개혁이라는 당시의 흐름 속에 그의 마음은 교편이 아닌 창업에 있었다. 하지만 마윈이 교편을 잡을지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주위 사람들은 지금의 기회는 다시올 수 없는 기회라 말하며 마윈을 설득했고 마윈은 그 말에 순응해 교편을 잡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마윈은 중학교, 고등학교를 선택하지 않고 대학교 교편을 잡았다. 당시 항저우전자공업대학에는 기계, IT, 전자 분야의 우수한 교수는 많지만, 무역, 외국어 등의 분야에는 교수가 적은 것을 보고 영어 교수이자, 국제무역 교수로 교단에 섰다.  이후 마윈은 교수와 제자로 만났던 인연을 통해 창업할 때 두터운 인맥 기초를 다질 수 있었고 교수의 위치로 만났던 수많은 경영인의 이야기를 통해 상인의 마인드와 철학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렇듯 마윈의 6년간의 대학 교수라는 기간은 창업의 기본을 쌓는 시간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마윈은 자신과 함께 교편을 잡았지만 지금은 퇴직해 집에서 쉬고 있는 동료 교수가 떠올랐다. 100위안(한화 약 18,000원)도 안되는 보조금으로 연명하고 있는 그들에게 연민의 정이 생긴 마윈의 머릿속에 “항저우에 전문 통역 기구를 설립하고 퇴직한 영어 교수들을 고용하면 퇴직한 교수들은 보조 수입이 생기고 항저우에는 전문 기관이 생겨 좋지 않을까?” 라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아이디어가 떠오른다고 해도 수많은 고민 끝에 창업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마윈은 생각하기만 하면 이룰 수 없다는 철학으로 친구와 함께 1992년 전문 통역 기구인 하이보통역사(海博翻译社) 설립하게 된다.

<마윈이 창업한 하이보통역사>

용기를 내어 창업을 감행한 마윈은 따뜻한 구들목에서 행복한 생활을 포기할 지라도 자신의 본분을 지키자는 마음으로 돈은 많이 벌지 못하지만 최선을 다하자는 마인드를 가지고 퇴직한 교수들을 초청해 사업을 꾸려나가기 시작한다. 창업을 시작한 후 마윈은 친구와 동료들에게 힘을 보태주기를 요청했고, 마윈의 실력과 인성을 알았던 그들은 자진해서 하이보번역사에 들어왔다. 하지만 생각만큼 이윤이 발생하지 않자 마윈은 이곳 저곳에 뛰어다니며 공예품부터 시작해서 작은 일용품까지 가져다가 항저우에 판매하면서 회사를 연명했고 나중에는 의료기기까지 파는 상황에 다다랐다.

마윈은 대학시절과 교수시절의 좋은 시작을 끝으로 힘든 창업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당시 사람들은 마윈의 창업을 두고 인생의 내리막이라 평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 눈에는 내리막이 아닌 급경사의 오르막이었다. “뚝심을 지키며 영원히 포기하지 않는다”는 IT 철학가 마윈의 스토리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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