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헤어드레서’, 기업가 정신이 약해지는 이유
2013년 05월 28일

본 글은 사람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영화를 기반으로 독자들에게 경제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한 도서, '경제학자의 영화관'의 저자이신 박병률 기자님의 블로그에서 허락을 받고 가져왔습니다. 영화 속 기본적인 이야기의 흐름, 스토리의 골격을 기반으로 경제학과의 상관관계를 찾아 경제학적 심리/행동을 엿볼 수 있는 재미있는 책이기도 하죠.

 

이 글은 이 책의 챕터 중 하나인 영화 '헤어드레서'를 통해 <기업가정신이 약해지는 이유>를 도출한 글입니다.

[출처 : http://cinemaeconomy.khan.kr/47]

 

여기, 둔중한 몸매의 여성이 있다. 벽에 연결된 커튼 줄을 잡지 않고는 홀로 침대에서 일어날 수 없다. 원피스 등뒤의 지크는 다른 사람이 내려주지 않으면 벗을 수 없다. 계단을 오를 때는 눈앞이 팽팽돈다. 상담을 위해 몇분 기다릴 때도 보조의자에 앉아야 한다.

그녀는 외롭다. 자신의 친구와 바람이 난 남편과 지난해 이혼을 했다. 딸과 함께 잔디가 있는 이층집을 빠져나와 초라한 다세대에 방을 잡았다. 뚱뚱하고 눈치 없는 엄마가 싫은 딸은 마음을 열지 않는다. 그녀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직장이다. 고용센터에서 추천을 받고 찾은 백화점 미용실에서는 그녀를 퇴짜놓는다. “미용사는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직업인데 당신은 아름답지 못하다”는 것이 구직거부 사유다. 세상은 그녀에게 냉혹하다. 차별에 익숙해진 그녀지만 이번에는 다리힘이 빠진다. 그녀는 어떻게 위기를 탈출할까?

 

도리스 도리감독의 <헤어드레서>(2010)는 뚱뚱한 여성의 분투기다. 그런데 어둡지 않다. 호리병 몸매를 한 카티(가브리엘라 마리아 슈메이데 분)은 녹색원피스에 노란허리띠를 매고 파란 자킷을 걸친 멋쟁이다. 그녀의 머리도 알록달록하다. 원색의 벽화와 파스텔조의 조명으로 덮힌 그녀의 방도 밝고 맑다. 독일 영화라 믿기 어려울 정도로 색감이 좋다.

그녀는 몇차례 벗은 몸을 보여준다. 출렁이는 가슴과 스크린을 꽉채운 엉덩이는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다. 조각처럼 빼어난 몸매만을 화면에서 봐온 관객으로서는 낯설고,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그런데 몇번보니 자연스러워진다. 나도 벗으면 저런 몸매와 뭐 그리 다를까 싶어서다. 베트남 불법이민자지만 극중 연인이 되는 티엔(김일영 분)과의 정사 장면은 야하기보다는 애처롭다.

<헤어드레서>는 영화속 영화를 담은 액자구조 영화다. 미용사인 카티가 손님에게 “저도 최근에 모든 것을 다 잃었다”며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백화점 미용실 옆 중국 음식점이 폐업한다. 미용사 구직에서 퇴짜를 당한 카티의 눈에 이곳이 눈에 들어온다. 만약 여기를 미용실로 바꾼다면.....그녀는 ‘구직’이 아니라 ‘창업’에 나서기로 한다. 미용업계가 포화상태라 경영이 어려울 것이라는 얘기도 들리지 않는다. 틀림없이 성공할 것이라는 믿음이 이미 온몸을 지배했다. 문제는 창업자금이다. 이혼 이후 빈털털이가 된 그녀에게 한달 월세와 보증금 2500유로는 만만찮다. 은행은 대출을 거부하고, 돈을 벌기위해 했던 이동미용실은 불법노동으로 걸린다. 취업센터는 파업으로 문을 닫으면서 창업지원금을 받을 길이 막막해 진다. 그녀는 취업센터에서 만난 브로커를 도와 베트남 불법이민자를 국내로 들여오게 한다. 카티는 과연 미용실을 열 수 있을까.

 

미용실을 개업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카티에게서 엿볼 수 있는 것이 ‘창업가 정신’(Entrepreneur)다. 흔히 ‘기업가정신’으로 번역된다. 자본주의의 주요 주체 중 하나가 기업이다보니 경제학은 20세기 들어 기업가에 대해 많은 주목을 했다.

‘기업가’를 정의한 대표적인 경제학자가 슘페터다. 슘페터는 1912년 발표한 ‘경제발전론’에서 낡은 것을 파괴시키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 변혁을 일으키는 ‘창조적 파괴’를 통해 자본주의는 원동력을 얻는다고 주장했다. 창조적 파괴는 기술혁신에서 이뤄지는데 기술혁신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기업가라고 밝혔다. 이윤은 기업가의 혁신 대가로 발생하는 것이라고 했다.
기업혁신에는 새로운 제품을 발명하거나 개발하는 것, 새로운 생산방법을 도입하는 것,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 것, 새로운 원료나 부품 공급자를 발견하는 것 등이 모두 포함된다.

기업가를 정의한 또다른 사람은 피터 드러커가 있다. 피터 드러커는 저서 ‘혁신과 기업가 정신’에서 기업가는 유용한 가치를 창출해 내고, 변화를 기회로 삼은 사람들이라고 정의했다. 기업가 정신은 "실천"이라고 밝혔다.

벤처기업 연구로 유명한 미국의 론스타드 교수는 “기업가 정신은 때로 빨간 신호등을 무시한채 돌진하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스스로 사업을 일으키고 이를 자기인생에서 가장 즐거운 일로 여긴다”는 말도 남겼다.

현대 경영·경제학에서 기업가정신은 매우 긍정적으로 묘사된다. 미용실을 개업하기 위해 딸의 저금통까지 터는 카티를 봤다면, 피터 드러커는 “살아있는 기업가 정신”이라며 박수를 쳤을 법하다. 카티는 “나는 헤어디자이너가 아니라 헤어드레서”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그 자부심은 성공에 대한 확신으로 이어진다.

저돌적인 기업가 정신이 필요한 이유는 어느나라든 창업까지는 벽이 많기 때문이다. 미용실을 개업하기 위해 은행과 취업센터를 수십번 들락거러야하고, 개업을 앞두고는 각종 인허가에 시달려야 한다. 카티 역시 ‘바닥이 법정 마찰계수보다 낮아 미끄러지기 쉽다’는 이유로 개업 허가가 유보된다.

하지만 저돌성과 실천성, 가치창조(수익창조)만을 강요하는 서구적 시각은 문제점도 많다. 안철수 서울대 교수는 도전과 혁신에다 세 가지를 더 보탰다. 사회적 책임의식, 사람들의 삶에 혜택을 줄 수 있는 새로운 것을 만들겠다는 마음가짐, 급변하는 트렌드를 앞서 읽는 통찰력과 비전 등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사람들의 머리를 이쁘게 꾸며서 기분을 좋게 하고 싶다”는 카티의 마음가짐은 ‘안철수식 기업가 정신’에 부합한다.

기업가정신을 주목하는 것은 일자리 창출과 성장을 위해서는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선진국들도 과거에는 ‘규모의 경제’를 강조하면서 대기업의 경할을 강조했다. 하지만 대기업만으로는 일자리창출과 성장의 한계를 느끼면서 중소기업의 역할이 강조되고 있다. 이른바 ‘관리형경제’에서 ‘기업가적 경제’로 전환됐다.

 

1인당 소득과 기업가 정신은 U자형 형태를 보인다. 소득이 매우 낮을 때는 창업에 대한 욕구가 높지만 어느정도 주머니가 차면 창업보다는 봉급을 받는 것을 선호한다. 그러다 소득이 더 늘어나는 사회로 가면 월급쟁이보다는 다시 창업을 꿈꾸게 된다.
산업연구원이 최근 펴낸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창업한지 3.5년 미만 기업의 비율은 2002년 14.5%에서 지난해에는 6.6%까지 뚝 떨어졌다. 또 이들 기업은 기회형이나 혁신형보다는 당장 먹고살기 위한 생계형이 많았다. 갈 수록 도전적인 기업가 정신이 약해지고 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기업가 정신이 약해지는 원인은 뭘까?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삼성, 현대 등 대기업 중심의 산업구조가 낳은 부작용으로 봐야한다는 주장이 많다. 한 중소기업 사장은 “5년정도 대학원까지 보내 인력을 키웠더니 거래하는 대기업에서 단숨에 사람을 빼가 더라”며 “인력과 아이디어를 대기업들이 가로 채지지 않고 공생하겠다는 사회적 합의가 있어야 더 많은 창업자가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단순히  요즘 청년들이 나약하거나 도전의식이 떨어지는 탓으로 몰아가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스티브잡스도 한국에 태어났더라면 애플사를 키울 수 없었을 것이라는 얘기는 그래서 허투루들리지 않는다. MP3, 아이리버, 미니홈피...우리도 IT분야에서 많은 젊은 도전자들이 있었지만 국내 대기업들은 이들을 그냥 두지 않았다.

정부정책도 대기업에 균형추가 쏠려있다. 최근 정부는 중소기업적합업종을 발표했지만 16개 품목에 불과했다. 중소기업과 자영업자들이 요청한 것은 은 173개였다. 그나마 "공생발전"이라는 아젠다 속에서 이뤄진 개가다. 이명박정부는 정권 초기부터 "서비스산업 선진화"라는 명목으로 대기업의 자영업 진출을 독려해왔다. 지금은 대기업이 할 수 없는 미용실과 안경점까지 개방품목에 넣었다가 2008년 여론의 반발을 받고 유보된 상태다. "삼성 미장원" "롯데 헤어샵"이 나와서는 카티가 창업을 할 수 없을 테다.

 

<헤어드레서>는 통독이후 독일의 사회문제를 엿볼 수 있는 구석이 많다. 여성문제, 불법 이민자 문제, 외모차별, 그리고 고용과 실업문제까지.
세계 어느나라나 그렇듯 창업은 쉽지 않다. 카티가 온갖 어려움 속에 창업해 대박을 일궜다면 한편의 판타지가 될 뻔 했다. 아쉽게도 영화는 그렇게 흘러가지 않는다. 카티는 베트남인이 운용하는 미용실에서 일하는 것을 끝을 맺는다. 세상은 살아갈만하지만 그렇다고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얘기다. <헤어드레서>의 균형감각은 그래서 많은 여운을 남긴다.

 

 

저자 박병률은 어느 날 뮤지컬과 영화를 보다 문득 “어? 저건 경제학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라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영화 속 경제 이야기에 관심을 갖고 글을 썼다. 《주간경향》에 2년간 연재하고 있다. 1999년 부산지역 신문사인 《국제신문》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고, 2008년 《경향신문》으로 옮겼다. 2006년부터 2011년까지 6년간 경제부 기자를 지냈다. 재정경제부, 산업자원부, 농림부, 해양수산부 등 정부부처와 금융감독원, 한국은행, 한국거래소, 증권사 등 여의도 금융권을 출입했다. 2012년 정치부로 옮겼고, 2013년부터 다시 세종시의 경제부처에 출입하고 있다. 2012년 TEDxBusan에서 ‘경제학자의 영화관’이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부산대를 거쳐 KAIST 과학저널리즘대학원프로그램(경영학 석사)을 마쳤다. 저서 《부산에 관한 스물두 가지 발칙한 상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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