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 관람가 13. <봄날은 간다> 뜨겁고 큰 감정의 사용법
2016년 05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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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은 간다>는 묘한 영화입니다. 상우(유지태)와 은수(이영애)의 사랑 얘기가 마치 나의 추억이라도 되는 양, 영화 포스터만 봐도 애잔함이 오는 이상한 영화입니다. 마치 전 여친이 좋아하던 음악을 듣게 됐을 때 불현듯 떠오르는 감정처럼요.

저만 그런 건 아닌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이 이 영화에 애틋한 정서를 갖고 있는 것 같네요. 특히 남자들이요. 이 서툴고 진지한 남자의 보편적으로 지질한 첫사랑이 마치 나의 기억인 듯 공감하는 분들을 많이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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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은 간다>는 청각을 자극하는 영화죠. 상우는 듣는 사람입니다. 소리를 채집하고 담는 사람입니다. 사운드 엔지니어인 상우의 일이란 산사의 눈 내리는 새벽이나 대나무의 흔들림을 녹음기에 담는 일입니다. 조용히 손을 모으고 앉아서, 아마도 소리와 소리 사이의 여백까지 유심히 듣겠죠. 상우는 감정이 섬세하고 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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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수는 말하는 사람입니다. 다 드러내지 않고 정제된 이야기만을 하는 직업, 라디오 PD 겸 아나운서입니다. 상우보다 나이가 많고 이혼 경험이 있는 은수는 너무 깊이 담지 않는 법을 배운 사람입니다. 깊은 마음은 깊은 상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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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우가 어떤 인물인지 짐작할 수 있는 장면이 영화 도입부에 있는데요. 아침에 일어나 마당에 나온 상우의 앞에 흰 벨벳처럼 첫눈이 깔려있습니다. 상우는 뽀득 소리를 재밌어하며 천진하게 그 위에 발자국들을 남깁니다. 멀대같이 키 큰 남자가 꼭 순수한 아이 같아 보이네요. 상우는 첫눈처럼 순수하고 그래서 아직 조금 촌스러운, 그러나 자신의 감정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만약 마당에 있던 사람이 은수였다면 첫눈을 상우만큼 반기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은수는 눈을 보고 나서 먼저 예쁘다는 생각을 하고, 그러나 출근길이 막힐 것 같다는 걱정을 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은수라는 인물은 ‘소화기 씬’을 통해 짐작해볼 수 있죠. 녹음을 마치고 방송국 복도에서 자판기 커피를 마시는 장면입니다.

자판기 옆에 놓인 소화기를 보고 은수는 상우에게 묻습니다. “소화기 사용법 아세요?” 그리곤 소화기 작동법을 차근차근 설명합니다. 그동안 여기서 커피 마시며 다 외웠다면서. 이혼 경험이 있다는 얘기를 하고 난 직후에 꺼낸 말이었죠. 은수는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뜨거워지지 않게끔 감정의 과열을 진화하는 법을 알고 있는 여자입니다.

상우가 부담스러워졌을 때도 소화기 앞에서 다른 남자를 만납니다. 은수가 감정의 과열을 진화하는 장면이라 말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처음부터 감정의 온도 차가 있는 채로 두 사람은 만나게 됩니다. 그 유명한 온 국민의 작업 대사 “라면… 먹을래요?”를 들은 밤부터죠. 상우는 은수를 마음에 담습니다. 사실 누가 안 그랬겠어요. 이영애 같은 여자가 라면 먹자고 하면 진라면 신라면 안성탕면 다 먹을 수 있습니다.

상우의 감정은 점점 깊어집니다. 술 취한 밤 은수가 보고 싶어서 친구 택시로 강릉에 달려갈 정도로 애절해지죠. 반면 은수는 너무 뜨거운 상우가 차츰 부담스럽게 느껴집니다. 아마도 과거의 아픈 경험은 상비된 소화기처럼 어느 구석에 남아 또 너무 뜨거워지려 하면 감정의 불씨를 꺼뜨려 버리는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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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은 간다>가 보여준 이 크고 뜨거운 감정. 이게 바로 이 영화를 떠올릴 때 우리가 느끼는 애틋함의 정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구에게나 한 번쯤 있었던, 모든 걸 바칠 만큼 큰 감정이요. 그런 아주 큰 감정은 인생에서 사용횟수가 정해져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애틋한 기억으로 남는 거겠죠. 그게 사랑이든 아니면 일이든 간에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상우는 갈대밭에서 서서 갈대를 흔드는 바람의 소리를 녹음합니다. 그 모습은 허수아비와 닮았습니다. 두 팔을 벌리고 늘 그 자리에 서 있는. 이때 상우는 씨익 웃어 보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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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들의 해석과 달리 저는 그게 상우의 성숙이나 달관이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 장면은 현실의 상우라기보다는 어떤 이미지라고 봤습니다. 그 웃음 때문에요. 상우의 웃음엔 달관하는 씁쓸함이 없었습니다. 그건 그냥 좋았던 어떤 것을 떠올릴 때 웃는 웃음이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언젠가 상우가 이 연애를 되돌아볼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았던 기억으로 그 자리에 남아 상우를 반길 거라는 걸 암시하는 장면은 아니었을까요.

상우가 그럴 수 있다는 믿음은 자신의 감정에 대한 진지함을 봤기 때문입니다. 눈치 보거나 계산하지 않고 자기감정에 전력을 다한 상우는, 자신도 그걸 알기에 후회가 없을 것 같습니다. 반대로 은수는 그러지 못했다는 걸 알기에 미련을 못 버리고 다시 상우를 붙잡으려 했던 게 아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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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 영화에서 ‘뜨겁고 큰 감정의 사용법’을 배웠습니다. 인생에서 그런 큰 감정의 사용횟수는 절대로 많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연애든 일이든 취미든요. 뭐에 홀리듯 스타트업을 시작하는 것도 뜨겁고 큰 감정일 것입니다. 그러니 상우의 연애처럼 서툴고 촌스럽더라도, 어쨌든 그 감정을 온 힘으로 진지하게 대해야 나중에 후회가 없을 것 같네요. 인생에 몇 번 없을 그런 귀한 감정은 온 힘으로 진지하게 대하는 게 자신의 삶에 대한 예의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미지 출처: 시네마서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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